
대학 가기 전 한창 만화방 다닐 때 봤던 것 같다.
우라사와 나오키 특유의 어두움이랄까.
약간은 무서울 정도의 기괴함 때문에
밤이 아닌 낮에 차근히 그의 모든 책을 다 읽었었다.
그리고 플루토는 내가 마지막 읽은 그의 만화책이었다.
오랜만에 넷플릭스를 들어가니
익숙한 포스터가 보였다.
'잉? 플루토?'
세상에. 10년도 더 된 만화책이 실사화가 됐다니.
어제 마침 중요한 일도 끝났겠다,
1화부터 정주행했다.
음악, 스토리, 작화 모든 게 미쳤다.
만화책을 읽으면서 느껴졌던
무서움, 희열, 기괴함 등등
여러 감정들이 그대로 느껴졌다.
가끔은 찰떡인 배경음악 때문에 감정이 증폭되기도.
영화를 보는 내내 ‘증오’와
’미래를 살아갈 자세‘에 대해 생각했다.
“증오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이다.
우리 모두 머리 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증오는 정말 많은 곳에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새로 시작되는 전쟁들,
아니 멀리가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도 많다.
본인이 속한 조직의 통일성을 강화하기 위해,
혹은 본인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다름을 비난의 핑계로 삼고, 때로는 증오를 만들어
특유의 소속감과 동료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쉽게 뭉쳐진 건 쉽게 흐트러지기 마련.
본질없이 증오라는 감정으로만 뭉쳐진 그룹은
방향성을 쉬이 잃기 마련이다.
거기서 멈춰야되는데, 아니.
그들은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증오의 대상을 찾는다.
AI에 수억개의 인격을 넣더라도 AI는 깨어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인격을 시뮬레이션해야 하기 때문에.
하지만 증오, 슬픔 등 편파적인 감정을 주입하면
그는 눈을 뜬다. 눈을 뜬 인공지능은 어떻게 행동할까.
애니메이션 속 악인들은 그렇게 눈을 뜬 AI다.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피해자인 그들이다.
의도치않은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그의 분노, 슬픔을 표출하기 위해
누군가의 증오가 주입된 대상일 뿐이다.
쉽게 비난할 수 없는 입체적인 인간들과
인간의 증오를 실현시키는 도구이면서도
그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는 고도화된 AI.
이 복잡미묘한 관계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애니메이션을 보다보면 또
앞으로 언젠가 다가올
인간과 기계/AI의 관계에 대해
관념론적으로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1. 애니메이션 속 인간들이 로봇을 비난하면서 말하는,
그 진짜라는 건 도대체 뭘까.
2. 삭제되지 않는 기억을 가진 기계는 인간인가.
3. AI가 고도화되면 정말 감정을 가지고,
스스로 사고를 할 수 있을까.
4. 그렇다면 인간과 AI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5. 인공지능을 개발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이 AI보다 나은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까?
증오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부딪히고 이야기하고 풀어가는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관계 간 거리는 멀어져가고
너무 쉽게 오해와 증오가 쌓인다.
언젠가 다가올 인공지능과 함께 하는 미래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아 할까.
정답은 없지만 그래도
방향성은 잃지 않고 살아가려고 한다.
- 껍데기 뿐인 증오에 쉬이 물들지 않기를.
- 조율하려는 노력과 열정을 잃지 않기를
- 그리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영화 HER와 공각기동대가 많이 생각났다.
공각기동대의 bgm을 여기에 썼다면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잘 살렸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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