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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일인칭 단수

세상과/1. 책

by 센슬리 2023. 4. 21.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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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환상의 세계로 가는 단편소설집
*글을 읽는 건 좋지만, 참여하긴 머뭇거려지는 그의 글
*난 하루키의 변태같이 디테일한 묘사를 좋아한다.
*이 글에는 그 묘사들이 쓰여있어서 포스팅이 길다.



아기 엄마가 빌려줬다. 벌써 주변에 아가를 키우는 친구가 있는 나이가 됐다. 운이 좋게도 내 친구는 근처에 살고, 또 나보다 더 책을 좋아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관심있는 주제에 대해 나의 지평을 열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너무나 좋은 친구.

서론이 길었다.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추천해준 책이었다.

나는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음 뭐랄까. 좋아하는 걸 모방하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좋아해 나도 그를 좋아하는 것처럼, 하루키 역시 내가 100% fall in love 했다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해서, 결론적으로 나도 좋아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굉장히 이상한 논리법이네.

근데 나는 늘 그랬다. 나의 취향과 습관 중 50%는 내가 좋아하는 주변인들의 것을 모방하는 데서 시작했던 것 같다.

자, 자꾸 얘기가 삼천포로 빠지네. 아무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가까워지지 않는 심리적 거리를 가진 하루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났다. 내가 왜 그를 좋아하는 지.


난 하루키의 변태라 생각될 정도로
디테일한 단어 선택과 묘사를 좋아한다.



물론, 이건 번역가의 능력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번역의 기초가 되는 건 원문이라고 믿기에, 내 취향의 근거로 당당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내 취향의 근거로 충분치 않다. 일단, 뭐가 변태적인 묘사인데? 라는 질문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여기, 예가 될 만한 몇 가지의 문장들이 있다.


불안정한 심정이었지만, 그렇게 곤란한 상황은 아니었다.


요컨대 나는, 호기심이라는 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여기저기서 머리를 부딪혀가며 학습하는 과정에 있었던 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의 미로를 수확없이 왕복하는 사이, 내의식은 표지판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기억이란 때때로 내게 가장 귀중한 감정적 자산이 되었고, 살아가기 위한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큼직한 외투 주머니에 가만히 잠재워둔 새끼고양이처럼.


아로새겨진 것은 한 시대, 한 순간의 ‘오직 그곳에만 있는’ 정신의 풍경이었다.


마주칠 때마다 무표정한 눈빛으로 - 냉장고 안쪽에 오랫동안 처박혀있던 건어물이 아직 먹을 만한지 점검하는 듯한 눈빛으로 -


저는 이것을 저 나름의 소소한 연료로 삼아, 추운 밤이면 근근이 몸을 덥히면서, 남은 인생을 그럭저럭 살아볼 생각입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음. 이 문장을 지금 만나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주머니 속의 이어폰처럼 엉켜져있는 내 마음을 꼭꼭 펴서 글로 담아낸 문장들을 따로 빼봤다.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밀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를 빠져나갈 때처럼.


물론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쪽이 훨씬 좋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 일 분은 일 분이고, 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에 비해 자신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 혹은 못생겼다는 것을 - 나름대로 즐길 줄 아는 여자는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아름다운 여자에게도 보기 싫은 구석이 있듯이, 어떤 못생긴 여자에게도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 그리고 그녀들은 아름다운 여자들과는 달리 그런 부분을 기탄없이 즐기는 듯했다. 대체도 없거니와, 비유도 없다.




적어보니까 알겠다. 내가 왜 하루키를 좋아하는 지. 비단 취향의 모방뿐 아니라 내 속에서도 애매모호한 감정을 결을 잘 빚어 정갈하게 정리해주기 때문이다.

나중에, 누군가가 하루키를 왜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이 글을 다시 볼 예정이다. 이 글을 쓸 당시 나의 가장 큰 고민 거리였던, 1)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2) 너무나 소중한 이 순간을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했던 4/20일의 오늘의 감정을 다시 느끼기 위해.

그래서 너 하루키 왜 좋아해?

저는 디테일한 묘사로
내 하루의 감정을 담아낸 대변해준
하루키의 문장으로
언젠가 오늘의 나를 기억하기 위해
그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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