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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6/ D-10

센슬리 2025. 3. 6. 23:13

 

풀마라톤을 준비하는 부상자의 책상. 

 

 

내일 아침 챙겨갈 것들 준비해놓다 문득 바라본 내 책상이 너무 어이없어서 사진 하나 찍었다. 평소에 하나도 챙겨먹지 않았던 건강보조식품들과 파스, 테이핑 테이프 등 ㅋㅋㅋㅋㅋ 나 정말 뛰고 싶나보다.

 

오늘 병가를 내고 골반 MRI를 찍고 왔다. 월요일 무릎통증으로 2km도 못 뛰었을 때는 억울하고, 화난 감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골절'일 수도 있다는 진단을 듣고 정말검사를 하러가는 오늘은 마음이 덤덤했다. 나는 집념이 강해 스스로 포기하진 못하지만 납득 가능한 외부의 원인이 있다면 내 탓을 하지 않고, 아쉬워하지 않은 마음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인 듯. 

다리는 아픈데 한 번에 가는 버스에 자리가 없어 3번이나 갈아타고 1시간이 걸려 병원에 갔다. N인 나는 시간될 때마다 상황을 상상하는데, 병원 가는 길 내 상상의 80%는 DNS 선언 인스타 스토리를 올리는 모습이었다. 

다행히 MRI 결과 골반은 깨끗했고, 주사치료와 병행해서 우선 주로에서 뛸 수는 있게 됐다. 37만원주고 정밀검사까지 해놓고 이상 없다는 말에 통증 원인이 뭔지 묻지도 않고 원장쌤한테 인사하고 나왔다. 물리치료사 선생님이 묻지도 않았는데 동아마라톤 다행히 뛸 수 있다고 신나게 자랑하며 치료를 받았다. 

 

집에 와 하루를 정리하다가 병원 방문 전,후 달라진 상황에 대한 나의 감정이 의아했다. 뛸 수 있다는 말에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검사 전 못 뛰는 상황을 덤덤히 수용했던, 나의 이중적인 모습은 뭘까. 나는 왜 그랬을까. 이 질문의 끝은, 나는 뛰고 싶은 걸까? 그렇다면 왜 뛰고 싶은 걸까?

 

요즘 최태성 선생님의 '역사의 쓸모'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중 오늘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이 있다. 송길영 작가가 얘기했던 것처럼, 그냥 하지 말라고. 주기적으로 내 삶의 방향성과 행동의 목적을 체크하면서 나아가라고 얘기했다. 요즘 불안도가 높아진 내 삶의 원인이 방향성과 '왜'라는 질문의 부재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중에 이 문장을 보고는, 내가 가장 많은 에너지를 쓰고 애쓰고 있는 '마라톤 준비'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이번 마라톤을 꼭 뛰고싶어하는 이유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책임감 때문이다. 첫 풀 마라톤 준비를 위해 무료로 받는 두 훈련 프로그램과 첫 풀을 완주하겠다는 내 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다. 근데, 내 인생을 남에 대한 책임감으로만은 살 수 없잖아? 그걸 위해서 두 달간 2백만원의 병원비를 쓰고, 주 1일 새벽 출근과 주말 출근을 병행하는게 납득 가능하니? 라고 스스로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건, 주로에서 도전하는 나를 위해 있는 힘껏 응원해주는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에너지, 연대감,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 몇 년 째 응원만 했던 도파민 터지는 그 순간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그리고 끝났을 때의 그 뿌듯함을 아쉬움 없이, 후회없이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싶다.

 

그 도파민은 다음에 느껴도 되지 않냐고? 맞다. 만약 할 수 없다면 다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지. 그리고 이미 장요근, 무릎, 발목의 온갖 통증들을 다 느껴봤기 때문에 뛰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 그래서 병원 가기 전 DNS를 더 많이, 자주 상상했던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뛸 수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다시금 열정이 타오른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어찌됐던 끝까지 해보고 싶다. 조금씩 전진하며 쌓아가기보다는 한 번에 원하는 걸 얻고자 하는 편인 나. 하지만 이번 동마 준비를 하면서 매일의 작은 습관과 노력의 중요성을 많이 배우고 있다. 10일 밖에 안남았지만, 또 반대로 생각하면 10일이나 준비할 시간이 있다는 것. 병원 잘 다니고, 약 잘 먹고, 스트레칭과 보강운동 잘하고, 그렇다고 업무 빵꾸내지 않으면서 남은 기간 잘 준비해보자.

 

봉준호 감독의 통역가로 유명한 샤론최는 얘기했다. 매일이 불안감과의 싸움이라고. 스피노자는 얘기했다. 두려움과 희망은 공존한다고. 불안은 억제와 제거의 대상이 아닌 당연한 거다. 중요한 건 그 감정을 병행해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 화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