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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센슬리 2024. 11. 15. 00:08

 
aespa - wiplash를 보면서 윈터 표정에 황홀해하다가 갑자기 fred again 노래가 듣고싶어졌다. 술에 취한 내 손가락이 잘못됐는지 fred again이 아닌 유튜브 뮤직을 찾았고, 추천 리스트로 skrillex의 ratata가 떴다. 무심결에 재생을 하고 이 글을 쓰면서 내가 할아버지 장례 후 느꼈던 '간격을 채우는 것'에 대한 충만함이 어렴풋하게라도 와닿았다.
 
요즘의 나의 고민은 '내가 과연 온전히 자립하고 있는가' 이다. 송길영 책의 영향도 크겠지만, 내가 일을 하면서 느꼈던 그 빈틈에 대한 아쉬움이 분명히 반영된 생각일 거다. 근데, 송길영이 말한 대로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성을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나에게 불완전성의 감정을 전달해주는 그 지식과 절차들을 내가 꼭 다 알 필요가 있는가? 아니. 나는 사업개발을 하고 싶지 지원 사업까지는 관심이 없는데.
 
송길영 책을 읽은 지 2주 째(2주라는 긴 시간 동안 짬 날 때만 읽어서 정확히 읽은 시간으로는 10시간도 채 안될 거다), 자기 객관화에 대한 욕망이 커졌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 내가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한다면, 최소한 지금과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방향성을 언어화하지 않아 송길영의 정갈한 단어들에 휘둘리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아니다. 나는 나 스스로 기준을 세울 수 있는 자립형 인간이길 바란다. 뭐 사주나 타로, 최근에 본 육해점(?)까지 내 성격이 굽히지 못하는 대장부라고 하지만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겠나. 아닌 건 아니 거고, 어렴풋한 희망이라도 최소한의 현실로 만들고 싶다. 저 먼 미래에는 가능하겠지, 라는 희망으로 무작정 본인이 믿는 신에 의해 현실이 실현되기를 바라지만은 않도 최소한의 주체성을 조금이라도 발휘하는 삶을 살고 싶다.

지금까지 내 삶의 노력들은 그 주체성에 대한 고군분투였다 생각한다. 언어의 정밀화, 감정의 구체화, 투명한 자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헌신. 나는 매 순간이 나에게 배움의 순간이라는 걸 믿는다. 내가 지금 한 선택이 설혹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지언정, 최소한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나에게 있다.
 
나는 내가 주체적이기를 바란다. 내가 사랑하고, 함께 있을 때 행복한 내 사람들과 평생 함께 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주변에 주체적이고, 자립이 가능한 사람들이 있기를 바란다. 그게 내 삶의 방향성이니까.
한창 정제된 삶으로 교훈을 주는 저자들은 40대더라. 그래. 그의 책을 읽는 나도 10년 후에는 정제될 거니, 어린 나이를 한 번 더 핑계삼아,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들에 최선을 다해 애정을 쏟으려고 한다. 설혹 상처 투성이로 슬퍼할 지언정 최소한 그 순간에는 솔직해 후회는 없을 거니까.

육해점 아줌마가 그랬다. 숫자 6개만 보고는, 친구를 너무 좋아하네요.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 안들어요? 어렸을 때라면 그런 생각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것 또한 내 선택. "뭐, 저 같은 사람도 있겠죠" 했더니, "받기만 하는 사람도 있어요"라고 대답하더라. 부럽긴 한데, 내 운명이 그렇게 태어나지 않은 걸 수용할 나이는 되었나보다. 
 
그래서 내가 목표로 하는 건, 사랑하는 내 가족은 가능한 오랫동안 내 옆에. 그리고 유나/미송/쭈구리는 내 평생 내 옆에.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삶을 함께 쌓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