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
*너무나 쉽게 판단해버리는 우리들
*다시 태어나고 싶을 만큼 외로웠을까
*책임감 있는 사람만 부모가 되기를
*다음을 상상할 수 없는 전개에 긴장감 가득
눈 수술 후 회복기간에 엄마가 서울에 왔다. 마침 집에 혼자 심심했던 차에 찾아온 손님과 집에서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 요새 MZ의 결혼관에 대한 얘기를 했다.
요새 애들은 경제적 조건이 충분하지 않다면 애를 낳지 않으려고 하더라. 그게 아이에게도, 본인들에게도 좋을 거라면서.
맞다. 경제적 상황 뿐만 아니라 부모라는 존재로서 아이를 책임질 인격적, 감정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낳지 않는 게 최선이라 생각한다. 나로 인해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세상을 살아갈 최소한의 울타리는 되어줘야하지 않는가.
이 영화 제목 때문일까. 영화 서사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래서 이 영화의 괴물은 누구일까’만 찾았다.
영화는 3개의 시점을 3번에 나누어 보여준다. 무리노 엄마의 시점에서, 호리 선생의 시점에서, 그리고 무리노와 요리의 시점에서.
마지막 아이들의 이야기가 전개될 때 마음이 울렁거렸다. 불과 어제 영화 리뷰에만 해도 쉽게 정의하고 고정관념 갖는 건 옳지 않다고 썼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각 인물들의 시점에서 보이는 이상한 장면들을 이어붙여 악인을 만들고 있더라.
무리노가, 호리 선생이 당한 것처럼 아무 의도없는 장난 혹은 스쳐가는 말들이 모여 어느새 비난받을 대상을 만들었다.
마지막 아이들이 기차길을 뛰어갈 때부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우리 다시 태어난 걸까? 아마도 아닐걸? 아 그래? 다행이다.” 다행이다. 라는 말 때문에. 그들도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아이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돼지의 뇌가 이식된 거다’라는 폭언과 폭행을 하는 아버지와 ‘몰래카메라’ 라는 핑계로 자기를 괴롭히는 반 친구들. 그 속에서 씩씩하게 웃고있지만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에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초등학교 5학년이라는 나이에 다시 태어나는 걸 생각하는 주인공의 상황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이를 잃은 엄마도, 주위 분위기에 따라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지 않다 결국 사회적 낙인이 찍혀버린 호리 선생도,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던 무리노도, 걸즈바에 불을 낸 요리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가해자지만 그를 괴물이라고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다. 이 불편하게 얽힌 관계는 시작점과 끝을 구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최소한 한 명의 원인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느꼈다. 완벽한 부모일 수는 없지만 최소한 아이에게 울타리가 될 수 있는 사람만 부모가 되기를. 나 이외의 다른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만 부모가 되기를.
선입견이나 편견이 덜 생기도록인지 모르겠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중 아이들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이번 영화도 주인공이 성인들이었으면 퀴어 쪽으로 포커싱이 됐을 테지만 아이들이었기에 조금은 거시적으로 판단하며 감상했었다.
따뜻하고 살 만한 세상이 되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아이들의 맑고 순수한 면을 많이 담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