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3. 전시

(전시) 순수박물관

센슬리 2023. 5. 16. 17:19

*공간 자체가 전시관인 곳
*사회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전시
 
 
 
 
전일 만난 친구의 방문 후기 포스팅에서 한 그림을 보고 급 오게된 곳이다. 그 그림은 검은 배경에 고래와 물고기들이 은하수처럼 헤엄치고 있었다. 원래는 일정 상 17시에 예약했지만, 어쩌다보니 1시간 일찍 도착했다.
 

 
1층에 대기 공간인 카페가 있어 해서 핸드폰 충전하면서 책 읽을 겸 있으려고 했는데, 예약이 비었는지 일찍 전시를 볼 수 있게 일정을 바꿔주셨다.
   

 
일단 도착하면 웰컴 드링크를 준다. 허브티와 커피 중에 고르는데, 하루 맥시멈 커피량인 2잔을 이미 마신 나는 허브티 한 잔 주문했다. 예쁜 잔에 초코렛과 함께 나온 허브티. 여러 이유로 예쁜 잔에 관심이 많아진 요즘. 예전에는 커피잔이나 접시가 비싼 걸 이해 못했는데 요즘은 왜 그런지 점점 이해가 된다. 나이가 들어가는 건가.
 
차를 다 마실 때 즈음 이제 전시를 시작해도 괜찮은 지 사장님이 물어본다. 전시는 카페가 있는 1층에서부터 시작된다. 카페 안쪽에 있는 기타 전시장 앞 테이블에 앉아서 시작하는 전시. 자리에 앉아 앞의 블록에 붙어있는 QR코드를 스캔하면 도슨트 화면이 나온다. 여기 전시는 이 도슨트의 이야기들을 따라 공간을 이동하면서 감상하는 전시이다. 
 

 
전시 내용은 사장님의 이야기. 기타를 치며 꿈꾸던 소년이 세상에 치이면서 무너졌던 과정과 다시 자신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여러 작품들을 엮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림뿐만 아니라 미디어아트와 조각품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을 1,2,3층 공간 별 특색있게 구성한, 보는 재미가 있는 신선한 전시였다. 
 

 
그 중 제일 마음에 들었던 그림.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커튼인데, 암막의 공간에서 비처럼 내리는 야광팔찌들과 잘어울려 마치 환상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임팩트가 컸던 그림이었다.
 

 
1층에서 도슨트를 들었을 때는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전시를 보면 볼수록 여러 부분에서 공감이 갔따. '사회에서의 자아 상실'. 사회에 맞춰가는 '사회화'와 달리 '나'를 상실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지난 5년 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형용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다 그 상실의 대상이 '나'라는 걸 알고 회사를 그만둔 나로서는 2층 전시품들의 여러 부분에 동질감을 느꼈다.
 
특히 '박하사탕'이 나오는 화면에서. '박하사탕'을 보면서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영화 속 설경구처럼 결국엔 나도 스스로를 파괴하는 선택을 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타인의 아픔을, 심지어는 죽음을 자기의 손익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 상실감과 공허감을 이겨내고 살까. 아니, 과연 그 감정들을 느끼긴 할까. 만약 느낀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지.   
 

 
이 이야기의 화자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과 같아지는 것을 그만두고 '나'를 찾기 위해 본인이 속했던 사회에서 나온다. '나'를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이야기가 채광이 가득 들어오는 곳에서 시작한 걸 보면 그 여정이 예전보다는 편안하다는 의미겠지. 
 
이야기의 마지막은 3층 테라스에서 끝난다. 마지막 전시 공간의 문을 열 때 느껴지는 달큰한 아카시아향과 오후의 나른한 햇빛. 그리고 열심히 땀을 흘리며 농구 코트를 뛰고 있는 사람들. 생기있는 순간이었다. 
 
퇴사를 한 지 약 5개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예전보다 훨씬 밝아진 요즘, 내가 진짜 하고싶은 게 뭔지 고민하고 있다. 삶에서 돈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꽤 중요한 돈을 벌기 위해 나와 맞는 분야를 찾고 있다. 가장 친한 친구는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게 싫어질까봐 일부러 가장 좋아하는 건 돈벌이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좋아하지 않으면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 나인지라 아무 곳에서나 일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선택을 하면 그 사회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또 치열하게 노력해야되니까 더더욱 내가 좋아하면서도 잘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 중이다. 
 
사장님의 이야기가 암막에서 시작해 아카시아향과 채광이 가득한 따뜻한 야외에서 끝난 것처럼 나도 그런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해야지.  
 

 
본인의 인생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꺼내 전시하는 게 쉬운 건 아니었을텐데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을 이용해 이야기를 전달해 보는 재미가 있던 곳이었다. 사회에 지쳐 위로가 필요하다면 가볍게 방문해보는 거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