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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손기정마라톤대회

나/3. 운동

by 센슬리 2023. 11. 21.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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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 10일 됐다.
1시간 동안 코피가 안멈추어
화장실 바닥이 빨갛게 물들어 갔던 그 날.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난생 처음으로 온 몸을 떨며 엉엉 울던 나와
다급한 목소리로 어디냐고 말하는 친구의 목소리를.



매 시간 매 순간 내가 더 잘하면 되겠지
나를 탓하며 버텼던 5년이 무녀졌던 건 한 순간이었다.
“내가 아니면 일도 없어. 일할 수 있는 걸 감사해“
일 하기 위해 직원을 고용한 회사에서
일을 주는 걸 감사하라는 곳.
정말 아주 질 낮은 가스라이팅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2번이나 팀이 해체됐던 경험을 했던
사회 초년생의 트라우마를 이용해 그는
커리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나를 배려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마다 직무를 바꾸어 일을 하게 하고
그의 목표치에 못미칠 때마다 나를 탓했다.
정말 질 나쁜 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사회 생활에서
’실패’라는 꼬리표를 달고 싶지 않았던 나는
뭔가 잘못된 걸 알았지만 정확한 이유를 찾지 않았다.
추상적인 느낌이 구체적으로 설명이 된다면
스스로가 더이상 못 버틸 것 같았기에 외면했다.
대신 내가 더 노력해야지, 맞춰가야지 하며
나를 탓하고, 채근하고, 갈아넣었다.
그럴 수록 나의 삶은 행복, 기쁨 등
포기하는 것들이 늘어나고
하지 말아야지 라는 제한만 늘어났다.
하고싶은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점점 피폐해지는 나를 보며 룸메는 그만두라 했지만
위에 말한 마음 때문에 억지로 버텼다.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코피로 화장실 바닥이 빨갛게 물드는 걸 본 순간
버티는 삶을 그만 살아야겠다 생각하고
바로 사직서를 냈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내 상황과 문제, 개선 방향에 대해 얘기를 해도
조직은 “예민한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문제를 방치하고 나를 탓했다.
오랫동안 그런 가스라이팅에 절여졌던 나는
지금 허망한 모든 상황이 내 잘못인 것 같았다.
남이 만든 죄책감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침반이 중심을 잃은 채 빙글빙글 돌아가던
딱 그 모습이었다.

그래도 시간을 낭비하지는 말아야지 하는
기본 신념 때문에 최소한은 움직였다.
그동안 부족하다고 느낀 공부도 하고,
기회가 있을 때 새로운 곳들을 여행했다.
잠시나마의 환기가 있었지만
예전의 감정들이 울컥 올러와 잠식당하기를 여러번.
많이 울기를 몇 달.
더이상 회피하지 않고 그 감정을 마주하기로 했다.
한 걸음 씩 마주해보자. 라는 생각이 들게 한 건
웨이트와 러닝 덕분이었다.

운동을 병행하며
1년 간 깨진 것들을 주워 담고
바닥을 다지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외관 상, 상황 상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그래도 내가 ”잘못된 사람“이라는 가스라이팅과
매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던 하루에서 벗어났다.
문제와 상황, 감정을 구분하여 볼 수 있게 됐고
편안하게 내 감정을 표출할 수 있게 됐다.

그 시간은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가장 큰 비중은 언제나 내 옆에 있는 가족과
각자의 방식으로 위로를 건넨 베프들.
그 다음은 러너들이었다.
도전하고, 같이 나눌 줄 아는 친구들.
덕분에 많이 힐링하고 채워졌다.
자립을 위해 충분히 단단해졌고,
타인에게 손을 건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보니 어느새 11월.
주변 사람들이 손기정 마라톤에 나간다 하더라.
가장 힘들었던 때와 비슷한 시기 대회라 욕심이 났다.
그 욕심이 지금 생각해보면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고 성취하는
그 과정을 나에게 선물하고자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510 오버 페이스 그룹으로 신청해 달렸다.
처음 1km를 뛴 순간부터 후회했다.
대회 전에 웜업을 했지만
빌드업없이 달릴려니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위에 말했던 개인적인 다짐과
같이 달리는 사람들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아
일단은 뛰었다.

4km 이후부터 DNF(10k 에서도)를 생각했다.
반환점에서 업힐을 무리해서 달려 다리에 쥐가 났다.
가양대교에 부는 강바람에 팔이 굳고
멈칫멈칫하는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달릴 수 없었다.
숨은 가쁘고. 다리는 아프고, 춥고.
호흡이 한 번 망가지니 쉽게 돌아오지 않았고
숨이 제대로 안쉬어져 자세를 볼 수도 없었다.

진짜 포기할까. 생각할 때
얼마 전 명상일기에 적은 문구가 생각났다.
몸에 힘을 빼고,
천천히 한 걸음 씩 움직이자.

결국 호흡이 다듬어지지 않아 8km에서 속도를 늦췄고
9km 업힐에서는 걷기도 했다.
그렇게 10km를 지나자 온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기록은 51:35분.
작년보다 3분이나 줄인 기록이었다.
목표를 이뤘다.



피니쉬라인으로 가는 길 기분이 너무 좋았다.
기록 자체도 정말 뿌듯했지만
그 간의 훈련들, 고민들이 떠오르며 뭉클해졌다.
1년 전만 해도 버티는 삶을 살던 내가
목표를 정하고 이뤄내는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나침반의 방향이 잡힌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가 잘못된 사람이라는,
예전의 트라우마로부터도 거리를 두고
한 걸음 씩이라도 움직이게 되었다.
매주, 매 순간 같이 시간을 보내며
긍정적인 기운을 준 친구들 덕분일 거다.

삶은 계속되기에 나는 또 다른 문제를 마주하고
그 상황들을 해결하면서 보낼 것이다.
마음대로 안되는 일들이 더 많겠지.
그래도 포기하고 위축되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움직일 수 있겠다 하는 확신이 생겼다.

계속해서 도전하고 성취하는 삶을 살자.
조급하지 않게 한 걸음씩.



최근에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된
Fred again의 Angie와 함께.

https://youtu.be/YPlR8gyVtWs?si=ZC6Mn95MXIvs-Q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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